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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의 역사

작성자 타올이샵(ip:)

작성일 2004-10-02 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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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고대 그리스에서는 집안에 손님이 오면 시녀에게 목욕 시중을 들게 했다고 한다. 손님이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가 있으면 시녀가 따뜻한 목욕물을 그의 몸 위로 부어주었고, 손님이 몸을 다 씻고 나면 양모를 짜서 만든 목욕 수건을 건네주었다. 손님은 수건을 천천히 몸에 두르고 욕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간혹 아주 귀한 손님이 오면 주인의 딸들이 시중을 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 목욕의 황금시대

로마의 대중목욕탕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처음 지어졌는데 제정 말기에 이르자 8백50여개의 대중목욕탕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카라칼라, 아그리파, 네로의 대중 목욕탕은 놀랍도록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카라칼라 대중 목욕탕은 부지 12만4천4백평방미터에 2천1백명이 동시에 목욕할 수 있는 광대한 욕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욕탕 말고도 도서실과 점포, 경기장 등을 고루 갖추었으니 거대한 사교장이나 다름 없었다.
로마황제들은 그들의 선임자를 능가하는 건축물로 자신들의 치세를 빛내고자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목욕탕이었다. 마침내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한꺼번에 3천명의 인원이 함께 목욕할 수 있는 사상 최대의 공중 목욕탕을 지었다. 이처럼 목욕을 즐김에 따라 물을 안정되게 공급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 로마에는 일찍부터 상수도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방대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도관 공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이다.당시의 목욕탕은 휴식이나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수영과 사우나, 향유 바르기, 체조와 같은 경기를 즐길 수도 있는 질탕한 오락장소였다.
특히 지체 높은 남녀는 욕탕의 시중꾼들로부터 각종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음부 마사지’였다. 로마시대 초기만 해도 풍기를 중시하여 남녀가 따로 입욕하였고, 낮에만 입욕을 허락하였으나, 말기에 이르자 남녀 혼탕이 된 것은물론이고 깊은 밤에까지 목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욕탕은 시나브로 음탕한 장소로 변질되어 갔다. 가정부인들마저도 남자들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노예를 시켜 자신의 몸을 씻게 하였다.



중세시대의 기사들 또한 목욕할 때 여자들의 시중을 받았다고 한다. 에센바흐의 궁중 서사시 「파르치팔」에서 보면 주인공이 느긋하게 목욕탕에 들어앉아 있을 때, 시중 드는 처녀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여자들이 남자의 은밀한 곳을 볼 수 없도록 목욕물은 온통 장미꽃잎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것이 목욕물을 식지 않게 하는 실용적 구실도 했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브르통은 장미탕이 여인의 음문을 상쾌하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의사들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로즈메리유 등의 향유를 38도의 온탕에 첨가하면 보통 목욕할 때보다 7배나 음핵의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13세기 들어서자 유럽에서는 개인 목욕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주로 대중 목욕탕을 이용했다. 대중 목욕탕은 모든 북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13세기 파리의 대중 목욕탕은 아침에서 점심때까지는 여자가, 오후와 저녁에는 남자가 이용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남자 탕객 중에서는 욕실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응큼한 이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1268년 파리 시는 남녀가 공간적으로 격리된 욕실을 사용하도록 욕탕 규정을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암암리에 남녀 혼욕이 이루어지는 목욕탕은 여전히 규정을 비웃으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녀가 있는 욕탕도 꽤 많았다. 이런 욕탕들은 유곽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매춘을 일삼는 창녀들을 공공연히 두고 있었다.
빈의 목욕탕도 이미 13세기부터 비밀 사창가라는 세평이 나 있던 터였다.

나체, 음식, 술의 향연 - 남녀의 사교장으로

당시 창녀를 둔 욕탕은 종종 일반 사창가와의 경쟁관계로 마찰을 빚곤 했다.
1477년 프랑스의 몽펠리에 있는 사창가 업주들은 시에 있는 두 군데의 ‘사창 욕탕’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들 욕탕의 창녀들이 이웃의 수도원으로 넘어들어가 수도사들에게 음란한 알몸을 보여주거나 음부를 드러내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녀를 둔 욕탕 중에는 아예 이름만 목욕탕일뿐 사창가 역할만 하는 곳도 있었다. 가령 아비뇽의 한 목욕탕은 단 한 개의 욕조 시설도 없이 침대만 잔뜩 갖춰 놓고 목욕탕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영국에서 ‘증기’라는 의미의 ‘스튜(stew)’라는 말이 ‘사창’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띠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목욕탕은 점점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들과 그런 여자들을 찾는 남자들의 휴게소로 변질되어 갔다. 중세 독일의 목욕 풍습 또한 제정 말기의 로마처럼 남녀 혼탕이었다. 물론 입욕시 천으로 허리를 감게 했으나 물 속에서는 이 천이 가리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 남자는 섶나무 가지로 앞을 가리고 여자는 앞가리개로 부끄러운 곳을 가려야 했다.
14세기 초 즈음 뮌헨이나 레겐스부르크 등 독일 남부지방에서는 결혼식의 피로연을 목욕탕에서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음놓고 즐기는 ‘벗은 몸과 음식과 술의 향연’이었던 셈이다.
그때의 목욕탕이 남녀의 사교장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목욕탕의 몰락과 향수의 유행

심지어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왕이었던 앙리 4세마저 사창 욕탕을 드나들었다. 창녀가 있는 목욕탕에는 식탁 대신에 목욕통 위에 판자를 걸쳐 술과 요리를 차려놓았으며, 그 위에서 도박도 즐겼다. 넓은 욕탕에는 마사지용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창녀 안마사나 때밀이는 때를 밀고 안마를 해준 뒤 손님을 유혹하여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갔다.
목욕탕이 이렇게 음탕한 장소로 탈바꿈하자 목욕탕 주인들은 점점 더 미모의 안마사와 때밀이 여자를 고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목욕탕은 순식간에 전멸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16세기 중엽부터 엄습한 매독과 흑사병으로 인하여 대중 목욕탕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중 목욕탕이 사라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온수가격이 오른 탓도 있었고, 대도시 부근의 연료용 나무가 고갈된 탓도 있었다. 향수가 유행하게 된 것도 그 덕택이었다. 몸을 씻기 어렵게 되자 몸의 불결함을 화장과 향수 사용으로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신사들은 몸에 향수를 뿌린 다음에야 귀부인을 방문했다. 특히 여자들은 목욕을 하는 대신에 온몸에 향수를 적신 다음, 화장품으로 마무리 단장을 해야 했다.

일생에 단 한번 목욕을 한 루이 14세

17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다시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터키탕, 러시아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17~18세기에는 고대나 중세만큼 청결을 유지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루이 14세의 건강을 기록한 1647년과 1711년 사이의 일지를 보면, 64년 동안 1665년에 단 한번 목욕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틀마다 포도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것으로 세수를 끝마쳤다고 한다. 1664년 영국작가 사무엘 페피의 부인은 난생 처음으로 대중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는 체험을 한 뒤 남편에게도 목욕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래야만 ‘밤의 봉사’를 수행하겠다는 조건을 내거는 통에 남편은 사흘 동안 버티다 끝내 목욕탕으로 향했다.

동양의 목욕, 정신적 정화의 의식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고대부터 대중 목욕탕이 있어왔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목욕이 종교의식으로 승화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서양에서와는 좀 다르게 제의를 위한 자기 정화의 정신적 성격을 더 많이 지녔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귀족들의 집에서는 대부분 목욕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사찰에서는 승려와 신도들을 위해 커다란 대중 목욕탕을 설치했다. 당시 목욕용 향료 또한 일상생활에 널리 쓰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서천왕 17년(286년)에 왕이 온탕에 가서 유락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인들은 신라인보다 더 목욕을 즐겼다고 하며,남녀 혼욕의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도경에는 사람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강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여인들은 목욕용 모시치마를 입고 물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적인 도덕율로 인해 목욕문화는 퇴색하고 만다. 현대적 개념의 대중 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서 비로소 선을 보였다.

목욕 좋아하는 일본 사람과 ‘남녀혼탕’

일본에서도 이미 고대 때부터 절집에 ‘온실’이라는 대중 목욕탕을 두고 있었다. 이 온실은 일반인들에게도 무료로 개방되었다는데 이용객이 많아지자 경제적 부담을 느낀 절에서는 보시의 개념에서 약간의 돈을 받았다. 이 점에 착안하였던 것인지는 모르나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자 시중에 대중 목욕탕이 생겨나 돈을 받고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의 대도시에는 점점 더 많은 대중 목욕탕이 들어섰으며, 16세기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는 전국 각지의 유명한 도시마다 빠짐없이 대중 목욕탕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의 목욕 풍속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목욕을 자주 한다. 그 까닭이 일본의 기후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별다른 여가활동이 많지 않은 일본 사람들이 하루의 피로를 욕실에서 풀어 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새벽에 목욕탕 가기를 좋아하는 반면 일본 사람들은 보통 저녁시간에 피로를 풀기 위한 목욕을 즐기기 때문에 목욕탕도 늦게 열고 늦게 닫는다.
또한 일본에서는 약 1백여 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남녀혼욕이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은 그가 쓴 ‘해유록’에서 일본의 혼욕에 대해 “남녀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목욕을 하는 것이 정말 기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남녀 혼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미 713년경 문헌인 ‘출운풍토기’에 나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 시대에는 남녀 혼욕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려졌지만 목욕탕 업주들은 이런 규제를 지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명치시대에 들어서면서 남녀 혼욕의 풍습은 본격적으로 금지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몇몇 도시가 외국인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이었다. 1868년에는 외국인이 드나드는 도쿄 지역 대중 목욕탕의 혼욕을 금했고, 이듬해에는 도쿄 전역에 혼욕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혼욕의 풍습은 이 때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터키탕과 ‘미스 터키’

그리하여 지금의 일본에서는 남녀가 혼욕하는 대중 목욕탕은 사실상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간혹 그런 곳이 있다하지만 그런 곳은 대개 노천 온천 같은 곳으로 주로 노인들이 가릴 것은 다 가리고 목욕을 한다. 그런 대신 오늘날에는 성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터키탕’이 생겨나 거의 공개적인 섹스의 배설구 역할을 맡고 있다. 일본인들이 목욕탕을 이용해 성적 욕구를 해결해 온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남자들의 목욕 시중을 들고 목욕이 끝난 후 접대하는 직업여성을 옛날 일본에서는 ‘유나’라고 불렀다. 유나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무로마치 시대였는데, 그네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때는 에도 시대였다. 당시 성황을 누리던 욕탕에는 대략 30명 내외의 유나 여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목욕문화가 현대에 접어들어 ‘터키탕’과 만남으로써 새롭게 부활한 셈이다. 물론 터키탕은 본디가 그렇듯 매매춘이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원래 터키식의 목욕이란 일종의 건조욕이다. 욕실에 뜨거운 증기를 불어넣어 땀을 빼고 몸을 씻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 받아들여지면서 일본 상인들은 여기에 안마 서비스를 더하여 여자 안마사를두고 그들을 ‘미스 터키’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점점 변하여 매춘 서비스로까지 변질되어갔던 것이다.그 터키탕이 우리나라에서도 성업을 하고 있고 요즘에는 미용을 위한 여러 목욕방법은 물론이고 목욕을 통한 질병 치료법도 개발되고 있다. 목욕이 가진 네가지 성격 즉, 제례적
의식으로서의 목욕, 청결과 미용을 위한 목욕, 치료를 위한 목욕, 유희로서의 목욕 가운데 제례의식으로서의 목욕을 빼고는 거의 한계를 모를만큼 발달하고 있는 것이다. 목욕이란 것의 가장 순수한 기능이 인간의 몸을 청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청결한 만큼이나 청결하지 않은 이면사가 존재해 왔다. 목욕에 관련한 인간의 역사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결한 동시에 불결하다”고.

 

출처 :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doolyking/6000603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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